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남한 대토벌 작전 (문단 편집) == 결과 == 일단 일본이 공식적으로 작성한 1909년 10월 27일자 [[http://db.history.go.kr/item/level.do?sort=levelId&dir=ASC&start=1&limit=20&page=1&setId=4&prevPage=0&prevLimit=&itemId=jh&types=&synonym=off&chinessChar=on&levelId=jh_099r_0100_0030&position=1|통감부 보고서]]를 보면 일본군 사망자는 불과 '''육군 [[병사]] 8명'''이 전부로, 계급별로 [[상등병]] 1명(병사), [[일등병|일등졸]] 5명(전사 2명, 경비정 전복으로 익사 1명, 도하 중 익사 1명, 추락사 1명), [[이등병|이등졸]] 2명(전원 경비정 전복으로 익사)이다. 붙잡은 의병이 1,100여명, 항복한 수는 700여 명에 달한다고 한다. 경찰의 보고에 의하면 이 기간 동안 희생된 의병장만도 103명이다.[*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6314|남한 대토벌]]] 특히 뼈 아팠던 것은 [[심남일]], [[안규홍]], [[전해산]] 등 지방 사족 출신이 다수였던 주요 의병장들이 전사하거나 체포되어 처형된 것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 의한 남한대토벌작전 전체 기간 중 양측의 피해규모를 살펴보면, 토벌대측은 사망자가 136명, 부상자 277명이었던 반면, 의병측은 사망자가 17,779명, 부상자가 376명, 포로가 2,139명이었다. 이 작전 이후 근거지를 상실한 의병세력은 만주·연해주 등지로 이동하여 본격적인 항일무장투쟁을 준비하게 된다. 한편 포로로 잡힌 의병들은 '폭도'로 규정당하고 일본군에 의해 해남에서 강진, 장흥, 보성, 벌교, 순천, 광양 등을 거쳐 하동까지 도로(현재의 국도 2호선)를 개설하는 강제 노역을 당하기도 했다. 그래서 일제는 이 도로를 '폭도도로(暴徒道路)'라고 불렀다. 이 작전 이후에도 경상도, 황해도 등지에서는 아직 의병이 남아있었으나 일본의 토벌로 인해 그 기세는 점점 약해졌다. 결국 한국이 일본에 병합당한 이후 국내에서 근거지를 상실한 항일 전투 세력은 국경을 넘어 [[만주]], [[연해주]] 등으로 망명하여 독립군으로 그 명맥을 잇게 된다. 덧붙여 이 학살로 인해 국내에서 대규모 항일 무력 세력이 와해되고 국내에서는 황해도 산간과 경북 일월산, 그리고 서남해 섬 지역 등지에 소규모 조직만이 남게 된다. 이후 항일 무장독립운동의 근거지는 국외인 만주와 연해주로 옮겨가게 된다. 남한 대토벌 작전에서 일본군이 저지른 악행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사망하며 재산 피해까지 발생하여 현재까지도 일본에 대한 한국의 감정이 매우 나쁘다. 게다가 일본은 이러한 악행을 전혀 사과하지도 않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